떠나기로 했다. 이번 여행엔 어디를 갈지도, 무엇을 할지도 똑바로 정해두지 않았다.
단 하나,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여행이길 바랐다.
그래서 짐을 쌀 때도 여느 때와 달랐다. 수건, 여권, 파우치… 그건 기본. 정말 필요한 건 그보다 더 가벼운 것들이었다.
🎒 천천히 걷기 위한 신발 한 켤레
가볍고 말랑한 운동화 하나. 속도를 낼 수 없는 신발. 오히려 발을 느리게 만들어주는 구두 같은 것.
이번 여행엔 골목마다 멈추고 싶을 테니까. 카페 앞 화분, 유리창 너머 책방, 그럴 때마다 발이 말을 들어야 하니까.
📓 안 써도 좋은 노트 한 권
어쩌면 아무것도 쓰지 않을 수도 있다. 하지만 들고는 간다. 낮잠을 자다가 떠오른 말 한 줄, 카페 창가에 앉아 훑은 생각 하나.
꼭 무언가를 기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도 모르게 꺼내게 되는 순간을 위해.
🎧 음악 없는 이어폰
방해받지 않기 위해서 이어폰을 낀다. 음악은 틀지 않는다.
낯선 도시의 소음을 필터링 없이 받아들이기엔 내 마음이 아직 복잡하니까.
차라리 바람 소리, 거리의 발자국, 잔잔한 혼잣말 정도만 들을 수 있게.
📕 아주 얇은 책 한 권
두껍고 묵직한 책은 무겁다. 가방도, 마음도. 그래서 딱 100페이지 안팎. 내용은 중요하지 않다.
커피가 내려질 때, 햇살이 커튼 사이로 드는 오후, 어깨를 기댈 벽이 있을 때 가볍게 펼 수 있는 책 하나면 충분하다.
🌿 향이 있는 무언가
호텔 방이 낯설 땐 향이 위로가 된다. 작은 고체 향수, 낯익은 핸드크림, 아니면 말린 허브 한 조각이라도.
여행은 공간을 바꾸는 일이기도 하지만 나를 데리고 다니는 일이기도 하니까. 나를 편하게 해주는 냄새 하나쯤은 슬쩍 넣어두자.
📌 짐보다 가벼운 마음 하나
마지막으로 짐에 꼭 넣고 싶은 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용기였다.
하루 종일 방 안에만 있어도 괜찮고, 계획을 취소해도 되고, 하루에 커피 한 잔이면 충분하다고 믿는 마음.
그 마음이 들어간 가방은 어느 도시든 나에게 가장 조용한 여행지가 되어줄 것이다.